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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이야기1998. 6. 8. 19:00

한겨레의 실험을 지켜야 한다


강 정 훈 


  우리들은 언제나 앎에 대한 추구를 지니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바를 위해서 끊임없이 알려고 노력하고 또 그 앎을 이용하려 하는 것이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 하는 말이나 행동들은 알고 있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렇게 누가 얼마만큼 알고 있고, 어떻게 알고 있으며, 어떤 것을 알고 있다는 그 앎의 성격에 따라서 이 세상의 모습은 만들어진다. 이는 점점 복잡화, 다양화되고 상호의존화되는 사회구조의 양상과 더불어 앎의 영향력을 더욱 크게 만들고 있다. 사람들이 앞으로의 시대를 정보화 시대라고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모든 권력요소중에 지식의 비중이 점점 더욱 높아질 것이다. 지식이 자본의 변동을 가져오는 세상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의 구조는 지식의 원천인 정보의 역할에 더욱 중요성을 가지게 한다. 그러나 많이 아는 것이 힘이 될 수 있지만 자칫 잘못된 앎으로 인해서 올바르지 못한 것에도 큰 힘이 실릴 수 있게 된다는 과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에 우리는 앎의 정확성과 방향성의 힘이 얼마나 큰 지 인식하여야 한다.


  일제 잔재와 미제의 굴레가 섞여진 지금까지 우리 현대사의 굴곡된 모습은 국민 대다수의 알 권리를 차단시키며 누려온 자본과 권력의 독단적 앎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정보의 올바른 선택과 제대로 된 정보제공자의 자세가 더욱 중요해진 사회에서, 한국 현대사는 권언유착의 고질적 병폐를 이기지 못하고 시대적 오류를 거듭해왔고 언론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해 버리거나 억압에 굴복하여 펜대를 꺾어 버리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의 근대화 과정에서 벌어진 권력의 독재와 독점재벌의 횡포에 언론은 충실한 여론조성 역할을 자임해 왔었기에 그로인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의 모습에 결코 그 책임을 저버릴 수 없는 것이다. 언론을 개혁하지 못하면 사회개혁도 기대하지 못한다. 언론이 우리의 양심으로 깨어 있었다면 부패하고 무능한 독재정권들이 국가 부도에 이르도록 권좌에 앉아 연명할 수 없었을 것이고, 인간으로서 보장되어야 할 기본권과 생존권이 짓밟히는 참혹한 상황으로 민중이 내몰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론조성 역할의 당사자가 언론 자신이기에 그 자신의 반성적 태도가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결코 그 책임을 물을 수도 없고 그들은 자신들의 책임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김영삼 정권 초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시행되었던 여러 사정작업중에서 유일하게 제외되었던 부분이 언론분야였다는 것은 그들의 자세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김대중 정부에서도 그 의지는 거의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럼 우리의 언론매체 구조는 어떻게 되어 있나. 거듭되는 혁신적 모습으로 수많은 매체가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지만 그 규모나 영향력면에서 아직까지 신문과 방송을 따라잡지는 못한다. 여기서도 수용자의 수적인 면만을 놓고 보면 방송의 월등함을 부인할 수 없지만 여론형성의 측면에서는 신문의 영향력이 우선시 된다. 우리의 신문시장을 이끌고 있는 중앙일간지들은 모두들 자신들이 민족정론지라고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독점재벌에 기생하여 버텨내면서 매판재벌화된 극우보수적 신문과 상업주의를 배격하는 대중적 정론지를 표방하며 6.29선언이후 6만 주주의 모금운동으로 창간된 한겨레신문의 양자구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겨레신문은 1988년 5월에 국민의 목소리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하고 바르고 용기있는 언론이 되기 위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국민주 신문이라는 형식으로 탄생하였다. 그리고 지금 1998년! 우리 역사상 첫 여야 정권교체가 이루어지고 5월에는 한겨레신문 창간 10주년을 맞이했다. 탄생후 10년동안 유일하게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자 역할을 자임해 온 한겨레신문에게도 과연 그 창간정신을 빛내 왔는지 새롭게 가다듬고 총체적인 반성과 함께 대중적 검증이 요구되는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에 대한 결과물이 모두가 좋은 것은 아닌게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들 민중들의 교과서 역할을 해온 한겨레에 대하여 과연 다른 보수언론과의 차이점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회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물론 창간 당시와 세상이 바뀐 탓도 있겠지만 한겨레가 일부계층을 위한 정파지의 성격을 띄고 출발한 것이 아니라 대중적인 정론지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한 언론인들의 자구책이었음을 생각한다면 정말 한계일 수밖에 없는가 하는 안타까움마저 든다. 유일하게 제대로 된 민주적이고 자본과 권력을 탈피한 언론이 우리들 옆에 있다고 믿고 있는 한겨레가 대중성과 경영논리를 앞세우면서 그 본질적인 창간정신에 위배된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나 하는 걱정이다. 적어도 겉으로는 줄어든 언론규제와 경제난국 상황과 함께 보다 심화된 경영난으로 더욱더 판매가치를 지닌 이익상품으로 전락하고 있는 언론매체들의 무한경쟁 시대에서 한겨레는 분명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의 문제는 무엇인가. 그리고 과연 한겨레는 정말 변질된 것인가.


  최근 한겨레에 대해 논의되는 것들 가운데서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그 상업성에서 기인한다. 사실 출발에서부터 기득권층인 권력과 재벌로부터의 독립을 기치로 내세웠기 때문에 현재까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중앙일간지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원초적으로 열악한 재정상황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겨레21을 필두로 씨네21, 한겨레리빙 등의 주간지나 전문지들을 창간한 가장 큰 이유가 열악한 재정난 극복을 위한 자구책의 일환으로 신문 주변시장의 확충을 위한 것이라고 하니까 한겨레의 상업성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 현실을 감안할 때 대중적 성격을 띄며 살아남기 위한 어쩌면 전제될 수밖에 없는 선택일지 모른다. 수익의 대부분을 광고로 충당해야 하는 신문사의 현실에서 가장 큰 수입원인 기업들에 대해 반재벌적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고, 딱딱하고 과격한 문구보다는 문화면이나 생활정보의 확충으로 대중화 확보에 미련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겨레가 더 급진적, 진보적인 언론으로 간다면 그들은 곧 현실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광고가 들어오지 않으면, 아니 기득권층인 광고주들이 광고를 실어 주지 않으면 그들은 현실 언론세계에서 그 흔적을 걷어버려야 할 것이기에 한겨레의 상업성은 어느 정도는 이 시대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덮어둘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한겨레는 친재벌적이어야 하고, 친권력적이어야 하고, 힘있는 자들의 비리와 횡포에 침묵해야 하는가. 그것은 분명히 아니지 않는가.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것은 한겨레가 자본주의 사회의 전장에서 홀로 투쟁하고 있다는 현실이지 그들의 세계에 녹아 들어가라는 것은 아니다. 한겨레는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든 신문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다른 언론들처럼 일가의 족벌이나 재벌 등의 기득권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학생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결과물로 그 투쟁들을 좀더 대중화시키고 기존 사회판에 접목시키기 위해 언론권력의 횡포를 비판해온 양식있는 언론인들과 6만여 국민 주주들의 힘을 모아 만든 것이라는 것을 한시라도 잊는다면 굳이 한겨레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는 중앙일간지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우리가 걱정하고 더 큰 문제라고 여기고 있는 것은 그로 인해 계속적으로 파생되는 또다른 모순적 문제점들이다. 그 첫 번째로 우리는 내부적 문제인 편집권 독립과 기자들의 성향 변화를 얘기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족벌과 재벌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타 언론사에 비해 한겨레는 편집권의 독립이 가장 잘 보장되어 있고 그에 따른 기자들의 공정성과 정확성이 있기에 대중속에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한겨레에서 나타났던 내부비판을 이유로 해직기자를 양산했던 사실과 일부 경영진의 파벌적 형태와 관련된 인사문제의 갈등적 표출은 결국 진보의 대변자라는 대외적인 모습에 가려져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문제이지만 조직의 문제점을 안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합리적이고 바람직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최근에도 경영진의 일방적인 구조조정 계획발표로 노사간에 갈등구조를 겪고 있다. 보수언론에 희망을 걸 수 없는 가장 큰 이유가 그들은 비판을 받은 적도 없고 받을 자세도 되어 있지 못하다는 이유를 한겨레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지면상으로도 곧잘 나타나는 기자 구성원의 문제. 한겨레의 창간 멤버는 기존 언론사에서 언론운동을 누구보다 열심히 펼치고 누구보다 이 나라의 민주화에 앞장섰던 언론인들이 해직당하고 반으로 줄어든 월급봉투를 감수하고 권력과 재벌의 벽에서 벗어나 사명감으로 뭉쳐 모여든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후에 입사한 기자들은 그런 사명감을 느낄 겨를 없이 책과 씨름하며 언론고시를 준비해 신문사 중의 하나에 불과한(?) 한겨레에 들어간 기자들이라는 사실이다. 대부분 다른 언론사의 신참 기자들과 별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그들의 생각은 나름대로 정열과 집념을 발휘하기도 하지만 한겨레라는 대외적 이미지에 포장만 되어 기사화되기도 한다. 이런 모습은 자율과 다양성이 보장되는 사내 분위기와 결부되어 한 사안에 대해 보도·사설·칼럼 등의 기사가 각기 다른 평가를 내놓는 사례를 만들어 한겨레의 관점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못한 채로 지면화된 경우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결국 이처럼 내부적으로 겪고 있는 문제점들은 지금은 조금 줄어들었다고는 하지만 구성원들의 분열상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해결점은 한겨레가 조직이기주의에 빠지지 않고 내외적으로 제기되는 비판에 대해 얼마나 겸허한 자세를 취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부적인 문제나 마케팅과 관련한 상업적 문제들도 결국 지면상에 어떻게 나타나느냐 하는 것에 따라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한겨레는 지난 10년동안 기존 보수언론과는 분명히 다른 색깔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 체제 내의 생존을 기본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겨레에 대한 비판도 기존 보수언론에 길들여져 있는 계층에게는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한다거나 신속성과 정보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비판을, 진보진영으로부터는 지면의 색깔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는 비판을 동시에 받아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에 내용적으로는 후자를 편집상으로는 전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상황에서 그 주체적인 정체성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한겨레는 기존 신문시장에 충격적인 역할을 해왔다. 일관된 색깔 없이 대중주의에만 영합하는 신문들에 비해 언론의 방향제시를 어떻게 하는 지 보여주었고, 한글전용·언어순화·가로쓰기 등의 편집상에도 신문시장을 이끌어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시각적으로나 마케팅상으로는 다른 신문들에 비해 독자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 점은 기사의 논조나 내용의 질적인 모습보다는 마케팅과 발행부수에 의해 영향력이 좌우되는 한국 신문의 구조적 성격을 생각한다면 자본력의 뒷받침이 부족한 한겨레로써는 한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결국 한겨레가 승부를 걸어야 하는 곳은 지면의 독자성 확립인데 이에 대한 확실한 방향성을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겨레 기자들에게 세가지 '자기 검열' 대상이 있다는 얘기가 있다고 한다. 노동운동과 학생운동, 북한문제, 김대중이 그것이다. 기존 극우보수세력의 비이성적인 평가에 대해서 일종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콤플렉스는 한겨레가 자체의 입장을 확실히 갖지 못한 채 진보진영의 여러 세력의 입장과 요구를 짜깁기식으로 반영하는 등 애매하고 막연한 진보지지 입장을 견지하게 되어 일부 보수세력과 학생·재야세력과 노동운동세력 모두에게 한겨레가 '자신들의 신문'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줘 기사가 나아갈 때마다 내부의 의견대립과 외부의 항의가 들어오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과정중에 진보진영과의 관계에 있어서 한겨레의 왜곡되고 편향된 이미지가 일부 누그러진 것도 사실이다. 그후 김대중 정권이 탄생되고 한겨레의 주변환경은 많이 변화하였다. KBS와 공동으로 개혁토론회를 주최하고, 논설위원이 방송사 시사토론회의 논객으로 등장하고, 논설위원 출신이 연합통신의 사장으로 임명되는 모습은 전에는 일어날 수 없는 사건(?)이다. 지난 대선때 일관되게 정권교체의 필요성과 김대중 지지를 역설했던 한겨레가 이제 여당지가 된 것이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물론 건전한 비판세력을 자처하는 한겨레에게 그런 비판은 매우 곤혹스러워 보인다. 정권교체후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대해서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고 김대중 정권에 대한 비판도 신념이 없어 보이지만 좀더 확실한 방향성을 가지고 철학과 신념을 펼치길 기대했던 사람들이 정권교체후 달라졌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독자성을 가지고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맞은 한겨레가 보이는 컴플렉스적 모습 때문이다. 사회의 개혁에 있어 비판할 것은 더욱 혹독하게 하되 침묵으로 넘어가려는 자세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너희는 도대체 누구편이냐?'라는 질문에 야당지에서 여당지로의 변화가 아니라 진정 '진보적 대중지'로서의 방향성을 확고히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시민의 폭동으로 알았었고, 중학생이던 내게 87년의 6월 항쟁은 일부 시민들과 학생들의 비현실적인 과격한 데모로 다가왔었다. 또 박정희가 우리 경제를 일으킨 영웅적 인물이고 전두환이 혼란스러운 우리나라를 안정되게 해준 인물인 줄 알았다. 물론 내가 그런 생각을 가졌었던 것은 방송과 신문의 말과 글들을 통해서 였으리라. 이렇게 지난 반세기동안 언론은 우리 현대사를 속여왔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러고 있다. 조선일보가 왜그리 비판받는가. 그 보수성때문이 아니라 항상 기득권편에만 서서 왜곡과 조작을 통해 국민을 기만하고 있기 때문아닌가. 그 속에 홀로 외롭게 서있는 한겨레는 지난 10년동안 아직 제대로된 사회적 가치관과 판단을 가지지 못한 많은 사람들에게 충실한 교과서 역할을 해왔다. 특정 사안에 대해 과연 무엇이 옳은 것이고 이 사회를 위해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가를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한겨레는 그 정답으로 믿어져왔다. 한겨레는 지난 10년의 세월 자체가 말그대로 '실험'이었다. 한겨레의 논조와 어울리지 않아보이는 통신판매나 여행사업, 생활정보지 등의 모습은 그들의 지속적인 생존을 위해 자본의 광고비율을 낮춰보려는 또다른 의미의 '실험'이다. 물론 그 실험에 대한 결과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사실인 듯 하다. 최근 한겨레신문사의 게시판에는 구조조정 계획을 놓고 경영진과 노조간의 대자보 공방이 이어지고 있다. 그 화두는 '실험'이었다. 새로운 실험을 위해 방향성을 어떻게 세울 것이냐의 현실적 고민인 것이다.  


  사람들은 한가지 일을 두고도 좋아라고 달려들기도 하지만 한가지 잘못 탓으로 무척 꺼려하거나 싫어하기도 한다.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이들 가운데는 '광수생각'을 보려고 조선일보를 보는 사람도 있으며, 한겨레가 너무 무겁고 무서워서 보기 싫다는 사람도 있다. 두가지 시각 모두 한가지로만 사물 모두를 헤아리려 하는 모습이 아닐까 한다. 이러한 것은 사람들이 저마다 자기 나름대로 생각해서 하는 일이니 뭐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우리가 이런 일을 보고들을 때는 그네들이 옳게 판단해서 행동을 하는지 일깨워줘야 할 것이다. 물론 한겨레가 창간 당시의 얼을 올곧게 지켜왔는가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위에서 말한 여러 문제점 또한 현재 한국의 보수언론들과 비교해 볼 때는 비판거리조차 되지 못한다. 변절한 한겨레를 포기하고 새로운 매체를 창간하자고? 웃긴 소리다. 10년된 한겨레가 변절했다면 그 과정의 문제를 연구해봐야 하는 것이다. 과연 다른 매체가 지금의 중앙일간지 시장에 뛰어든다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리고 변질되지 않을 수 있을까? 아직까지 한겨레를 포기할 만한 다른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이 글을 읽고 있고 한겨레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이 우리 사회에서 한겨레를 변치 않게 할 수 있고 그 영향력을 크게 할 수 있는 것이다.

Posted by 정훈온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