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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1998.10.17 한국언론의 역사
미디어 이야기1998. 10. 17. 15:07

(사)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에서 주최하는 '언론학교'의 강의내용과 26기(98가을) 수강생의 강의평가 (9)



한국언론의 역사


김 동 민 (한일장신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1. 제국주의 침략과 구한말의 언론

한국언론의 역사를 서술하고 평가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은, 언론이 국제정세의 흐름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바탕으로하여 시대적 소명을 올바르게 수행했느냐가 될 것이다. 민족이 처한 현실을 정직하게 인식하고 모순을 지적하면서 대안을 모색해왔는가의 역사관이다. 이 기준 내지 사관(史觀)은 구한말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유효하다. 한국사에서 구한말은 세계사적으로는 제국주의의 군사 침략의 시기에 해당된다. 


그렇다면 마땅히 언론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의도를 폭로하면서 그에 맞서기 위한 민족의 역량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했어야 한다. 이같은 기준과 소명에 합당한 역할을 했던 신문은 하나도 없다.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 정도가 일제의 침략에 맞서 투쟁했을 뿐 그밖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신문인 한성순보를 비롯해서 한성주보, 독립신문, 제국신문 등은 민중계몽에 치중하였다. 나라는 망해가는데 한가하게 계몽적인 역할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2. 일제하의 언론

일제는 3·1운동 이후 철권통치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하면서 1920년 3개의 조선인 신문을 허가한다. 대정실업친목회의 조선일보, 김성수의 동아일보, 민원식의 시사신문 등이다. 이 신문들이 시대적 역할을 했느냐를 평가하기에 앞서 원초적으로 그럴 수 있는 소지를 가지고 있었느냐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발행인의 면면이나 자본의 성격을 분석해 보면 쉽게 드러난다. 대정실업친목회는 친일상공인들의 모임이고 민원식은 악질적인 친일분자였으므로 조선일보와 시사신문의 성향은 분명하다. 문제는 동아일보다. 


김성수, 송진우 등은 소위 민족지를 창간한다고 하여 주식모금을 했다. 그러나 모금은 잘 되지 않았고 결국 김성수가 많은 출자를 하여 최대주주가 되었다. 그러면 김성수가 출자한 자금의 성격은 무엇인가? 일제는 합방 이후 대대적인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했다.


이 사업의 의의는 봉건제적 농업구조를 자본주의적 농업구조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즉 규모있는 토지자본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이 사업의 결과 본래 고창 지역의 지주였던 김성수 집안은 대지주로 변모하였다. 따라서 총독부와는 결코 적대적일 수 없는 관계가가 형성되었다. 김성수 일가는 이 토지자본을 토대로 하여 산업자본으로 진출하는데, 경성방직, 삼양사, 보성전문학교 등이 그것이다.


동아일보에 투여된 자금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으로 동아일보에 식민통치에 저항하고 독립의식을 고취한다는 시대적 역할을 기대할 수 없는 한계를 부여한다. 총독부의 입장에서도 조선인 신문을 허가할 때 이 정도 쯤은 고려하지 않았겠는가? 


투쟁적 지식인 혹은 언론인이기 보다는 개량주의적 정치인이었던 김성수, 송진우 등이 할 수 있었던 일이란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인 자치의 모색이었다. 그 의도는 1924년 정초 이광수가 쓴 일련의 사설 <민족적 경륜>에 잘 나타나 있다. 식민지 지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나 독립의식의 고취는 찾아볼 수 없다. 


압수 정간 등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로 진실을 은폐하려고 하지만 탄압의 구실이 된 기사들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 공히, 식민지배의 청산과는 거리가 먼 지엽적인 문제들이었다. 그것도 초창기의 현상이고 해가 거듭될수록 식민통치에 동화되어갔고 1920년대 말에 이르면 축구대회, 한글보급운동 등 다분히 수익사업의 성격이 농후한 스포츠 행사나 문화행사에 매몰되어 갔다.서두에서 제시한 기준과 역할에 충실하고자 했던 언론은 <조선지광>이나 <비판>과 같은 잡지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었다. 

193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황군에 지원할 것을 독려하는 등   아예 친일언론의 길로 나선다. 황국의 신민으로서 황국군대에 지원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됨을 감읍하면서 사지로 갈 것을 재촉하였다. 동아일보의 경우 일장기말소사건으로 1년여의 정간을 당한 후 복간호 사고(社告)에서 총독부에 사죄하면서 향후 '대일본제국의 론기관'으로 복무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토록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두 신문은 1940년 8월 강제 폐간 당하는 운명에 처한다. 총독부는 두 신문이 영원히 발행되지 못하도록 인쇄시설까지 강제 매각토록 하였다.


3. 미군정기의 언론

일제 패망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조건부의 언론자유를 공표하였다. 미군의 통치에 반대하지 않는 한 언론(신문발행)의 자유를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수많은 신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편, 일제가 식민지배를 합리화 하고 조선인을 동화시키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세운 경성방송국은 미군이 신속하게 접수하여 군정청 산하에 두었다. 일종의 국영방송으로서 군정의 홍보매체로 이용했던 것이다.   

해방 직후의 정세는 진보적 진영에서 주도했고, 따라서 신문의 발행도 진보적 계열의 숫적으로나 영향력 면에서 신문이 압도적으로 우세했다. 미군정은 이같은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시작한다. 미군정에 협조적인 보수우익신문을 육성하는 한편 자주독립국가를 지향하는 진보언론을 탄압하는 정책을 펼친 것이다. 미군정은 보수언론의 육성 차원에서 조선일보는 매일신보(서울신문)에서, 동아일보는 경성일보에서 인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하여 두 신문의 속간을 도왔다.


반면에 진보언론에 대해서는 군정법령 88호를 발령하여 새 신문의 창간을 차단하면서 탄압에 들어간다. 결국 미군정 3년을 거치면서 진보계열의 신문은 모조리 도태되고 친미보수언론의 세상이 되었다. 그리고 방송은 미국식의 상업방송 포맷이 도입된다.


4. 자유당 정권하의 언론

보수신문 일색에서 여당 지와 야당지가 뚜렷하게 대별되기 시작한 이 시기는, 경제적으로 원조경제시기에 해당한다. 원조경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던 신문들, 특히 야당지들은 정부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조절해 나가다가 자유당 정권의 실정이 거듭되고 민심이 이반되면서 본격적인 반독재 노선을 견지한다. 


대표적인 야당지로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꼽는데, 동아일보는 이승만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김성수가 발행인이었으며, 조선일보는 김구를 지지하던 입장이었으니, 여기에 야당지 출현의 필연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승만은 언론을 통제하기 위해 여러 차례 입법을 시도하지만 성사시키지 못하고, 급기야 구한말에 일제가 만들어놓은 '신문지법'과 미군정 시절의 '군정법령 88호'를 동원하기도 한다.


5. 공화당 정권하의 언론

4·19 혁명 후에는 신문의 수가 급증하였다. 전국적으로 일간신문만 115개(중앙지 64, 지방지 51)에 달했다. 이는 정치적 격변을 치른 후의 보편적인 현상이며 시장경쟁을 통해 자연스럽게 정비되는 게 보통이다. 그런데 박정희 군사정권은 인위적인 언론사의 정비를 단행했다. 5·16 쿠데타 직후인 1961년 5월23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포고 11호로 <신문통신사 시설기준령>을 발표하고, 이에 따라 중앙지 49개 지방지 27개사에 대해 폐간조치를 하였다. 살아남은 신문은 중앙지 15개 지방지 24개였다. 적용 조항은 위헌적인 시설기준이란 것으로, 이 시설기준은 오늘날의 정간법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언론사의 정비가 의미하는 바는 경쟁지들을 대거 거세함으로써 독점적인 시장을 형성해주는 것이었다. 여기에다 살아남은 신문사에게는 각종 특혜를 제공하였다. 차관경제의 시기에 하늘의 별 따기와도 같은 차관혜택을 주었고, 은행빚을 유예하는 한편 추가의 저리융자를 제공했다. 세제상의 혜택도 부여되었다. 땅 짚고 헤엄치기식의 경영 조건을 마련해 준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상업주의 언론의 태동을 알리는 신호탄기도 했다.    


특혜성장의 기틀을 부여받은 언론사주들은 당연히 독재정권과 유착관계를 형성했다. 저널리즘은 사라지고 정권의 대변지만 존재하였다. 개발독재의 와중에서 인권이 유린되고 노동자 도시빈민 등 소외계층의 불만이 팽배함에도 언론은 이를 외면하였다. 오히려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매도하면서 정부의 정책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였다. 권언유착의 화려한 시대가 막을 올린 것이다. 게다가 저임금구조를 행정적으로 물리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면세점 이하의 임금을 받거나 아예 무임금의 기자들이 수두룩한 가운데 노동조합설립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이를 저지해준 것이다. 제 역할을 못하는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지탄이 비등해지면서 양심적인 기자들은 자유언론수호(실천)운동에 나서는데, 정부와 사주들은 한 패가 되어 이들을 해고하기에 이른다. 이때(1975년) 조선일보 기자 30여명,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의 기자, 프로듀서, 아나운서 등 130여명이 해고되었다. 이들은 후에 1980년 해직기자들과 더불어 민주언론운동협의회를 만들어 조직적인 재야언론운동을 전개하고 한겨레신문의 창간을 주도하게 된다. 정부의 특혜와 지원에 힘입은 신문사들은 1970년대 말 대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국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기자들의 저임금이라는 희생을 발판으로 하여 돈벌이에 매진했던 결과였다.


6. 전두환 정권하의 언론

광주를 피로 물들인 전두환 정권은 언론을 오늘날의 오만 방자한 또 하나의 권력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 언론통폐합으로 보다 확고한 독점적인 시장을 만들어주었다. 서울의 신아일보를 폐간시키고 6개 중앙일간지를 조석간 사이 좋게 나누었다. 지방지는 1도1신문 원칙에 따라 대거 정비하여 완벽한 독점시장을 구축해주었다. 개체 회사가 해야 할 기자교육을 언론연구원이 대신해주기도 했다. 이같은 구조에서 신문사는 독점기업으로 일취월장 성장을 구가하는 가운데 기자들의 월급이 대폭 올랐고, 거기다가 주택자금 융자, 자녀 학자금 보조, 해외연수 등의 혜택이 The아졌다. 그 결과 기자들은 저널리즘 정신을 잃어버리고 샐러리맨으로 전락한다. 


방송은 통폐합과 함께 공민영체제에서 공영체제로 전환한다. TBC와 DBS가 강제 매각되어 KBS로 귀속되고 MBC는 주식회사에서 공영방송으로 틀을 갖추게 된다. 방송을 완벽하게 정부의 통제하에 묶어놓았던 것이다. 방송은 공영방송 제도가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당시의 공영방송이란 허울 뿐이요 사실은 국영방송이나 다름 없었다.


7. 6·29선언과 언론시장의 변화 

6·29 항복선언은 신문시장에 일대 변화를 가져왔다. 신문의 발행이 자유화 되면서 중앙과 지방에서 많은 일간지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독점구조와 카르텔이 무너지고 증면경쟁과 치열한 시장쟁탈전이 시작되었다. 한겨레신문이 창간된 것도 이즈음이다. 정권의 통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신문들은 생존경쟁의 구도에서 본격적으로 자본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언론사 노동조합의 설립과 더불어 언론노동운동이 새롭게 전개됨으로써, 1990년대에 활성화되고 있는 시민언론운동과 함께 언론민주화운동을 주도하는 한 축을 이루게 되었다. 자본의 통제가 강화됨으로써 신문노조는 이미 그 동력을 잃어버린지 오래인 반면, 공영방송제도하의 방송노조는 여전히 방송민주화의 주춧돌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정부는 상업방송의 폐해를 지적하며 개편된 공영방송제도의 재개편을 시도한다. 역설적으로 공영방송제도의 무사안일주의를 들먹이며 경쟁력을 높이고 시청자에게 채널 선택권을 넓힌다는 명목으로 상업방송을 재도입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부는 학계와 방송계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회에서의 날치기 통과로 소위 공민영제도의 근거를 마련한다. 그에 따라 개국한 SBS는 방송 프로그램의 저질화와 편파보도를 주도해오고 있다.      



"한국 언론의 역사"(김동민;한일신학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를 듣고 나서...


 강의는 지금 우리나라 언론의 문제점으로 권언유착을 지적하면서 이런 현실을 만들게된 역사적 맥락으로 제국주의 침략하의 구한말 언론실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살펴보는 형식을 취했다. 그중 방송은 그 역사가 비교적 짧고 점차 개혁적인 측면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해석하지만, 신문은 그 언론기능의 본질이 왜곡되어 있고 지향점도 잘못되어 있다는 의견을 밝히고 그에 대한 논거를 제시한다. 강사가 지적하는 언론의 문제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두가지 초점이다. 그것은 '소유구조 개선의 필요성'과 '통일지향적인 성격의 필요성'이다. 특정 재벌이나 족벌이 그 언론사를 지배하는 '소유구조'의 문제는 그런 독점적 구조가 역사적으로 구한말이후 진보진영과 보수진영으로 나뉘어 있는 매체별 특성이 일제와 미군정기, 이승만, 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반공·친미·보수적 성격으로 굳어지게 되고 전두환 정권의 통폐합 조치로 언론사 내부적으로 남아있던 개혁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권언유착'의 모습이다. 결국 이런 예속적인 권언유착의 현실에서 그 성격이 현실유지적이고 반통일적이라는 지적이다.


- 모두 자신들이 정통 민족지라고 주장하고 있는 현재 거대한 언론시장을 이끌고 있는 매체들을 역사적 흐름을 통해 파악으로 그 속에 감춰져있는 진실된 측면을 파악할 수 있었다.

- 우리나라 신문의 저널리즘 기능에 있어서의 문제점과 관련하여 그 출발점이 '소유구조'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재벌언론의 '소유구조'에 대한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는 대안·대항언론의 시도가 계속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강의의 주제가 한국 언론의 역사이기에 이론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현 언론의 모습을 볼 때 언론의 역사를 너무 단순화시킨 것은 아닌가 한다. 시간적 한계로 '방송'을 제외한 것은 그렇다고 쳐도 신문을 살펴봄에 있어 한겨레신문 창간이전의 시대까지만 취급하고 지금의 현실이나 앞으로의 방향성이 빠진 점이 아쉬웠다. 현재 언론의 구조와 역사를 파악할 때 물론 기존 보수언론의 문제점의 지적도 중요하겠지만 한겨레신문의 위치와 앞날의 제시가 있었어야 되지 않나 한다. 또한 최근 활발한 논의가 되고 있는 뉴미디어를 통한 매체와 생활정보지 등의 신매체의 가능성을 언론 역사적 측면에서 짚어보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물론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겠지만 한국언론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 '권언유착'의 문제 못지 않게 '자본과 언론의 유착'관계의 해석이 필요하고, 점차 치열하게 진행되는 경쟁사회속에서 언론이 그 생존수단으로 삼는 자본과의 관계의 해석이 언론의 역사적 측면에 있어 앞으로의 지향점을 논할 때는 더욱 필요할 것이다.



Posted by 정훈온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