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이야기2000. 6. 5. 19:29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묻는다면 아마도 '사랑'이라고 대답할 사람이 가장 많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사람이 마음속에 담아놓고 있는 이상적인 가치이다.

그중에서도 남녀간의 사랑은 개인의 사적 영역이지만 다른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이뤄지고 어느 한편으로 일방적이지 않고 새로운 것을 창출해가는 힘 또한 가지고 있다. 그만큼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대중매체인 방송이 놓칠 리가 없다. 최근 방송프로그램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대표적인 소재가 바로 '사랑, 연애'와 같은 남녀 문제다.

그래서인지 많은 방송 프로그램들이 남녀문제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들을 제작하고 있다. 이때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런 '남녀 관계'를 어떻게 접근하고 다뤘느냐 하는 것이다. 사적인 성격이 강하고 다양한 이해관계와 세밀함이 필요한 남녀문제의 본질이 방송에서 어떻게 그려지느냐의 문제는 각 개인의 사랑관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 사회의 사랑에 대한 가치를 만들어가는 과정의 가운데 있다.

그럼 한번 TV를 켜보자.
서로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4명씩의 미혼남녀가 나와서 질문하고 자기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한명씩의 이성을 선택하여 커플이 된다. 채 한시간이 못걸린 시간동안 그들은 주위의 축하를 받으며 어느새 연인사이가 된다.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에 방송되는 문화방송(MBC)의 <사랑의 스튜디오>는 어느새 6년을 맞이하는 젊은이들의 미팅 프로그램의 고전이 되었다. 거의 비슷한 시각 한국방송공사(KBS)와 서울방송(SBS)도 젊은 남녀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다.

한국방송공사(KBS) <접속 해피타임>(일 오전 9시40분)도 인터넷을 통해 사전에 출연신청자의 이상형을 분석해 첫 만남에서 선택까지의 과정을 단 몇 분으로 압축시키고 여성출연자의 집에까지 달려가 교제승락을 받아낸다.

SBS는 같은 시간대의 <러브게임>에서 4명의 미혼 남성이 매주 여성 한명을 놓고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한 갖은 정성을 보여주며 경쟁하는가 하면 다른 코너에서는 한 남자 출연자가 나와서 공개구혼을 한다.

그리고 밤 10시50분의 <남희석의 토크 콘서트-색다른 밤>에서는 연인들의 사연을 받아 이중 선정된 커플을 초대하여 러브레터를 소개하고, 주인공을 위한 이벤트까지 열어준다.

이 뿐만 아니다. <남희석·이휘재의 멋진만남>(SBS 토 밤9시50분), <기분좋은 밤>(SBS 금 밤9시55분), <夜 한밤에>(KBS2 목 밤11시) 등에서 수없이 남녀커플들을 만들어내고 연인들의 사랑을 공개하고 공식화시킨다. 짝짓기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이런 포맷들은 이제 오락프로그램의 하나의 양식으로까지 자리잡았다.

방송의 오락프로그램들이 이처럼 짝짓기에 열을 올리는 것은 젊은 남녀의 사랑고백과 만남이 호기심과 흥미를 자극하는 소재이면서도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인 관심사라는 데서 출발한다. 더구나 이런 소재는 지극히 개인의 사생활인데 방송이라는 공적인 대중매체는 그 힘을 이용해 공적 공간으로 끌어들여 안방에서 부담없이 엿보게 만든다.

이에 젊은이들의 의식 또한 남을 의식하지 않고 데이트 상대자를 구하고 만남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변화되었다. 자기를 드러내는데 거리낌없어 방송 출연도 적극적이고 자발적이다. 1회용 만남을 조장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출연 신청은 급증하고 높은 시청률 또한 어느 정도 보장된다.

하지만 가볍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방송, 그것도 오락프로그램속에서 남녀간의 관계를 얼마나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남녀 관계는 공식이나 현상으로 설명될 수 없고 인격적인 교감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짝짓기 프로그램의 만남이 보여주는 화려하고 세련된 데이트 코스와 풍성한 이벤트 속에서 드러나는 경력과 외모, 말재주에 의한 몇 십분만에 결정된 O, X의 즉흥적인 선택을 진정한 사랑으로 설명할 수는 없는 것이다.

비단 이런 가치의 문제 뿐만 아니라 계속 새롭게 신설되는 짝짓기 프로그램들이 대부분 차별성이 거의 없이 천편일률적이라는 것도 지적된다. 또한 남자들은 일류대 출신에 안정된 직장을 가지고 있고 여자들은 한결같이 날씬하고 예쁜 사람들 뿐이다.

순간적·일회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과정 자체가 다른 평가기준, 예를 들면 인간성이나 인품을 파악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출연자들이 자발적으로 모든 과정들을 선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TV가 주는 감각적인 이데올로기속의 조건과 외모만이 선택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넘쳐나는 TV속의 만남에 나의 진실된 만남을 내던지기는 싫다.

<국민대학보 6월 5일자에 게재된 글>
Posted by 정훈온달